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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S9
2026-07-31
4
15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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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일본어: 東京ヤクルトスワローズ 도쿄 야쿠루토 스와로즈[*], 영어: Tokyo Yakult Swallows)는 일본의 프로 야구 구단으로, 센트럴 리그 소속이다. 도쿄도를 연고지로 하고, 도쿄도 신주쿠구에 있는 메이지 진구 야구장을 전용 구장으로 하고 있다. 또, 2군(이스턴 리그)의 홈구장은 사이타마현 도다시에 있는 야쿠르트 도다 구장이다. 1950년 고쿠테쓰 스왈로스(国鉄スワローズ)라는 이름으로 창단되었으며, 1978년에는 팀의 센트럴 리그 첫 우승과 같은 해 일본 시리즈 우승을 시작으로 1990년대에 들어서 4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제패하여 팀의 황금기를 장식하기도 하는 등 통산 9번의 리그 우승, 6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시즌 후 리그 확장 방침에 수반한 구단 난립의 여파로 각지의 고쿠테쓰 철도국(당시) 야구부는 다수의 선수가 유출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1949년 가을에 당시 고쿠테쓰의 총재 가가야마 유키오는 “국철의 신사태에 즉응하여 친밀한 프로 구단을 결성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라는 발언을 했다. 신사태란 고쿠테쓰가 그 해에 공공기업체로 발족한 것을 말한다. 또 대폭적인 합리화 정책으로 노사 관계가 악화되었고, 이 어두운 분위기를 바꿔 직원들의 단결과 의지 함양을 위한 밝은 직장 만들기를 위해 스포츠 중에서도 특히 인기가 높은 야구의 프로 구단 설립을 발안했다. 가가야마 유키오가 야구를 대단히 좋아했던 것에도 구단 설립에 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 국유철도법을 저촉하게 되어 고쿠테쓰가 직접 모회사가 될 수 없었고, 고쿠테쓰의 하위단체인 재단법인 교통 협력회(현 : 공익재단법인 교통협력회·주식회사 교통신문사)가 주체가 되어 1950년 1월 12일 재단법인 철도홍제회, 닛폰 통운, 일본교통공사(현 : 공익재단법인 교통협력회, 주식회사 교통신문사) 등의 기업을 통해 주식회사 고쿠테쓰 구단(株式会社国鉄球団)을 설립. 또한 교통협력회가 발행하는 철도업계지인 ‘교통신문’에서는 1950년 1월 12일에는 교통협력회 이사장인 이마이즈미 히데오가 센트럴 리그에 가입 신청을 했다고 보도했다. 마찬가지로 교통협력회가 발행하는 ‘교통연감’의 〈쇼와 25년 교통연보〉에서는 5월 18일 주식회사 고쿠테쓰 구단이 설립한다라고 보도되었다. 구단명을 고쿠테쓰 스왈로스(国鉄スワローズ, Kokutestu Swallows)로 정하고, 센트럴 리그에 가맹. 초대 감독에는 니시가키 토쿠오가 취임했다. 고쿠테쓰 참가 직전 센트럴, 퍼시픽 리그는 7개 구단이었고 양리그는 8번째 구단을 환영하고 있었다. 대기업인 고쿠테쓰의 프로 참가로 센트럴 리그 관계자들은 활기를 띄고있었고, 퍼시픽 리그와 벌일 리그 참가 권유 전쟁을 우려한 센트럴 리그와 고쿠테쓰는 이를 극비로 진행했다. 항간에서도 고쿠테쓰의 리그 참가의 소문이 나고 있었지만, 퍼시픽 리그는 “고쿠테쓰가 프로 구단 등을 만들 리가 없다”며 얕잡아 보고 있었기에 리그 참가에 순조롭게 성공했다. 홈구장은 전 체신성 총재였던 마쓰마에 시게요시의 노력으로 무사시사카이역 경계에 위치한 구 나카지마 항공기 공장 철거지에 새로운 야구장 ‘무사시노 그린파크 야구장’를 건설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1956년에 폐쇄되면서 실질적으로 7경기 밖에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신구단에 비해 리그 참가가 늦었기 때문에 선수 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자가 부담의 철도국 야구부를 중심으로 다른 사회인이나 대학 등의 아마추어 야구에 남아있는 인재들를 모으려 했지만, 프로 경험자는 제 2차 세계대전 이전 한시기 한큐에서 일시적으로 뛴 나카무라 사카에 한 명 뿐이었다. 아마추어 야구의 강호였던 철도국 야구부 선수들조차 프로 야구에선 쉽게 통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쇼치쿠 로빈스의 2군 감독이었던 모리야 료헤이와 일찍이 심양만주철도 클럽에 재직하고 있던 우사미 가즈오를 추가로 보강해, 클린업을 강화시켰지만 그 후에도 빈공에 시달렸다. 3월 10일의 구단 첫 공식전의 다이요 웨일스에 2-1로 패해, 계속되는 11일의 히로시마전에 3-2로 구단 첫 승리를 안겼다. 그러나 초반의 3월 21일부터 14연패, 4월 26일부터 10연패로 최하위로 떨어졌으나, 8월에는 가네다 마사이치가 고등학교를 중퇴하여 입단해, 10월 1일에 프로 첫 승리를 올려 그 해 8승을 기록한 팀은 종반 13연패의 히로시마를 대신해 7위를 차지했다. 시즌 종료 후에 니시닛폰 파이레츠가 세리그를 탈퇴하면서 세리그는 7구단이 됐다. 개막부터 4월에 걸쳐 12승 4패로 선두에 올랐지만, 5월에 들어가 6연패로 2위에 떨어졌고 6월에는 3승 10패로 전반전 종료 시에는 6위를 차지했다. 8월에 들어가 가네다 마사이치가 이달 6승을 올렸고, 팀은 11승 10패로 승리 5위로 부상하며 그대로 시즌을 마치게 되었다. 가네다는 22승을 거두어 최다 탈삼진을 획득하고, 9월 5일에 구단 최초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또 츠치야 고로가, 구단 최초의 타이틀이 되는 최다 도루를 획득했다. 이번 시즌부터 프랜차이즈제가 도입되어 고쿠테쓰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마이니치 오리온스, 다이에이 스타즈, 도큐 플라이어즈와 함께 고라쿠엔 구장을 연고지로 했다. 개막에서 2승 2패로 한 후는 4연패, 4월에 들어가 4연패와 6연패, 5월에 10연패와 연패를 거듭했지만, 마츠타케와 히로시마가 침체한 것으로 5위로 시즌을 종료. 이 해에 120경기제가 되어 첫 50승에 도달했지만, 이 중 절반 가까운 24승은 가네다 마사이치에서 2년 연속 탈삼진왕이 되었다. 또, 사토 타카오가 구단 최초의 신인왕을 획득했다. 쇼치쿠와 다이요가 합병한 것으로, 이번 해부터 세리그는 현재 6구단제로 이행. 45승 79패 1무에 끝나 선두 요미우리로부터 42게임 차로, 5위 다이요 쇼치쿠와 4.5게임 차이로 구단 첫 최하위가 되었다. 니시가키 토쿠오가 감독을 퇴임해, 후임은 후지타 소이치가 임명되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이적한 우노 미쓰오의 맹활약에 힘입어 같은 해 요미우리전에서 8연승을 거두었다. 우노와 하코다 히로시가 구단 첫 베스트 나인을 획득했다. 선두 주니치로부터 32경기차, 55승 73패 2할의 리그 5위로 시즌을 마쳤다. 10월 19일, 가네다 마사이치가 시즌 350 탈삼진을 기록, NPB 신기록이 됨과 동시에 메이저 리그 밥 펠러(348 탈삼진)를 제치고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주 1]가 됨으로써 메이저 리그의 밥 펠러 348 탈삼진을 넘는 세계 신기록. 또, 마치다 유키히코가 31홈런을 쳐내며 홈런왕을 획득. 57승 71패 2무로 선두 요미우리와는 34.5게임, 4위 히로시마와 1게임 차이의 5위로 시즌을 마무리, 후지타가 감독 퇴임하고, 후임은 우노 미츠오가 임명됐다. 우노 감독이 취임하면서 요미우리를 철저하게 마크해 11승(13패)을 기록하는 등 대 요미우리전에서 호각의 시합을 펼쳐 고라쿠엔의 고쿠테쓰와 요미우리의 경기는 당시 간토 지방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경기였다고 한다. 오와키 테루오가 5월 3일의 대 주니치전(나고야 구장)에서 노히트 노런, 미야지 유토가 대 히로시마(가나자와 겐로쿠엔)에서 구단 첫 기록이자 일본 프로 야구 세 번째가 되는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팀은 선두 요미우리외 21게임 차이, 61승 65패로 4위로 마치게 된다. 시즌 오프, 난카이 호크스로부터 이이다 토쿠지를 금전 트레이드로 획득했다. 가네다 마사이치는 7월 15일 대 주니치전(나고야 구장)에서 2000탈삼진을 기록. 8월 21일의 대 주니치전(나고야 구장)에서 프로야구 네 번째의 퍼펙트 게임을 달성해, 이 해에는 최다 승리와 최우수 평균자책점을 획득해, 사와무라상과 자신의 첫 베스트 나인으로 선택되었다. 사토 타카오가 22홈런으로 홈런왕이 된다. 팀은 58승 68패 4무로, 선두 요미우리로부터 15.5게임 차의 리그 4위로 시즌이 끝났다. 개막전의 대 요미우리전(고라쿠엔)에서 가네다 마사이치가 요미우리의 루키 나가시마 시게오를 4타석 연속 삼진으로 억제하는 등, 4-1로 승리한다. 다음 4월 6일 더블 헤더에서도 4-2, 4-3으로 승리하고 개막 3연승을 거둔다. 5월 24일의 한신전(고시엔)에서 이이다 도쿠지가 아킬레스건 절단해,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의 연속 경기 출전 기록이 1246에서 멈추었다. 6월 6일, 가네다가 구단 첫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주 2] 팀은 2년 연속 58승 68패 4무로, 선두 요미우리로부터 17.5게임 차의 리그 4위로 시즌을 마친다. 가네다 마사이치가 투수 부문 삼관왕(최다승, 평균자책점, 탈삼진)과 사와무라상을 획득했다. 이 해도 개막전의 대 요미우리전(고라쿠엔)에서 가네다 마사이치가 요미우리의 루키 오 사다하루를 23삼진으로 억제시켰다. 팀은 63승 65패 2무, 선두 요미우리로부터 15.5게임 차의 리그 4위로 시즌이 끝났다. 9월 30일에 가네다 마사이치가 대 주니치전 (고라쿠엔)에서 승리를 거뒀고, 10년 연속 20승을 달성했지만, 팀은 54승 72패 4무, 선두 다이요로부터 17.5 게임 차, 7년 만의 최하위가 됐다. 우노는 감독에서 사임, 후임으로 스나오시 쿠니노부가 임명되었다. 6월 6일, 모리타키 요시미가 일본 프로 야구 사상 다섯 번째가 되는 퍼펙트 게임을 달성. 67승 60패 3무로 첫 리그 3위를 기록하며, 구단 최초, 고쿠테쓰 구단으로서 최초로 마지막이 된 A클래스(리그 1위 ~ 3위), 시즌 통산 승차를 기록했다. 9월 5일, 가네다 마사이치가 메이저 리그, 월터 존슨의 기록을 넘는 통산 3509 탈삼진을 달성. 51승 79패 4무, 선두 한신으로부터 24게임 차의 최하위가 됐다. 세리그는 3할타자가 1명이라는 투고 타저의 시즌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고쿠테쓰 팀 타율은 .201(313득점)이었다. 이것은 2리그제 이후의 최저 기록이다. 11월, 도에이와 함께 한국에 원정을 떠나, 친선 경기를 했다. 스나오시는 감독을 퇴임, 후임은 하마사키 신지가 임명되었다. 해마다 기하급수로 증가하는 경영비 때문에 경영 주체는 교통협력회에서 철도 홍제회로 바뀌었지만, 공공기업·고쿠테쓰 구단이라는 체면도 있어 상당한 긴축 재정이었다. 신인 선수의 계약금은 급등하는 한편으로 만족한 보강도 할 수 없었고, 같은 해에 일어난 미카와시마 사고에 대한 비판은 구단에 대해서도 비화되고 있었다. 결국 1963년 8월, 구단 양도를 전제로 한 업무 제휴를 산케이 신문, 후지 텔레비전, 닛폰 방송, 분카 방송과 연결, 후지산케이 그룹과의 관계가 생겨, 이 시점에서 실질적인 경영 주체는 후지산케이 그룹으로 구단 경영 주체가 바뀌었다. 5월 8일 대 다이요전(고라쿠엔)에서 가네다 마사이치가 통산 300승을 달성. 팀은 65승 73패 2무, 선두 요미우리로부터 18게임 차의 리그 4위로 시즌을 마친다. 하마사키는 감독을 퇴임, 후임은 하야시 요시이치가 임명됐다. 연고지를 고라쿠엔 구장에서 메이지 진구 야구장으로 이전했다.(이전의 경위에 대해서는 고라쿠엔 구장에서 경영 주체가 된 후지 TV를 통해 경기를 중계하기 위해서 홈구장을 옮긴 것이다.) 7월 30일, 가네다 마사이치가 입단 2년 차인 1951년부터 14년 연속이 되는 시즌 20승을 달성. 61승 74패 5무, 선두 한신과 18.5게임 차의 5위로 시즌이 끝난다. 같은 해 오프 시즌, 하야시 기이치 감독의 경질과 유임을 둘러싸고 산케이 신문과 국철이 격렬하게 대립했다. 에이스의 가네다가 “바야시 감독이 그대로 속투했을 경우 이적하지만 해임된 경우는 잔류한다”는 성명을 내놓았기 때문에 국철은 열심히 하야시의 승패를 주장했다. 한편 산케이 측에서는 타사 언론(요미우리 신문,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에 의해 ‘하야시 감독 경질’이라는 특종 기사가 퍼져나가고 있었고, 논의는 평행선을 걷다가 최종적으로는 경영 주체의 산케이 측이 유임을 강행했다. 결국 하야시 감독은 유임되었고 가네다는 특권을 행사해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가네다를 잃은 것으로 고쿠테쓰는 경영 의욕을 완전히 상실했고, 후지산케이 그룹에 경영권을 모두 양도함으로써 구단경영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고쿠테쓰 구단은 업무가 제휴된 이후 후지산케이 그룹의 자금력에 의존하고 있어 이양은 시간의 문제라고 보였지만 결국 갈등 끝에 결별과 구단 양도라는 결말이 되고 말았다. 4월 23일, 고쿠테쓰는 구단의 경영권을 산케이 신문과 후지 TV에 양도하는 것을 정식 발표하고, 5월 10일, 산케이 스왈로스(サンケイスワローズ)로 개칭했다. 산케이 초년도가 되었지만, 고쿠테쓰 초년도 이래의 90패 이상이 되는, 44승 91패 5무로 시즌을 마쳤다. 선두 요미우리와는 45.5게임 차가 되었다. 이 해부터 드래프트 회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1위 지명의 가와모토 카즈아키를 비롯해 11명 중 9명이 입단 거부를 했다.[주 3] 1월 7일, 소년 야구 팬을 늘린다는 이유로 인해, 당시 후지 TV에서 철완 아톰이 방송되고 있던 것과 데즈카 오사무가 당시 구단 후원회 부회장(회장은 도쿠가와 무세이)이었다고 하는 경위도 있어 철완 아톰을 펫마크로 사용해, 팀명을 산케이 아톰스(サンケイアトムズ)에, 운영 회사명을 주식회사 산케이 아톰스(株式会社サンケイアトムズ)로 개칭했다. 같은 해 야쿠르트 혼샤가 주식을 취득해 구단 운영에 참가했다. 팀은 52승 78패로 다이요와 나란히 5위, 선두의 요미우리와는 37게임 차로 시즌을 마무리지었다. 58승 72패 5무에 선두의 요미우리와는 26게임 차의 리그 5위를 기록했다. 요미우리에 3승 23패의 참패를 거뒀다. 고라쿠엔 구장에서 13연패였다. 타케가미 시로가 신인왕을 획득했다. 1월 28일,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 다케야마 구장이 완성되어, 2군 홈구장이 되었다. 5월 26일에는 대 히로시마전에 승리해, 구단 통산 1000승을 달성했다. 일본 프로 야구 2년 차에 접어든 데이브 로버츠가 40홈런을 치는 등 베스트 나인을 획득했다. 투수로는 이시도 시로쿠가 팀으로서는 가네다 마사이치 이후가 되는 시즌 20승을 거뒀다. 64승 66패 4무, 선두의 요미우리과는 13게임 차의 리그 4위를 기록했다. 산케이 신문 본사의 실적 부진 때문에 산케이는 구단 주식의 일부를 야쿠르트 혼샤에 매각했다. 구단 경영에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던 미즈노 시게오가 갑작스런 병으로 쓰러면서 뒤를 이은 시카나이 노부다카가 후지산케이 그룹의 전반적인 사업 재검토를 실시한 결과, 불채산이었던 프로 야구 구단 경영으로부터 철퇴하고, 자본 관계만 이어가기를 결정했다. 당시 야쿠르트 혼샤는 미즈노와는 전부터 친분이 있던 관계로 미나미 키이치가 대표를 맡고 있었다. 실질적인 경영권은 야쿠르트 혼샤가 쥐고 있였지만, 표면상은 공동경영을 표방하며 구단명을 아톰스(アトムズ)로 변경하고 운영 회사명을 주식회사 아톰스 구단(株式会社アトムズ球団)으로 하게 됐다. 이는 2리그 분립 이후로 팀명에 기업명과 지역명 등의 관명이 붙여지지 않는 유일한 예가 되었다. 이 해에는 밥 찬스가 24경기에서 12홈런을 기록했고, 58승 69패 3무로 선두의 요미우리와는 16.5 게임 차의 5위를 기록했다. 1월 7일에 야쿠르트 혼샤가 공식적으로 단독으로 경영권을 가지게 됐고, 구단명을 야쿠르트 아톰스(ヤクルトアトムズ)로, 운영 회사명을 주식회사 야쿠르트 아톰스(株式会社ヤクルトアトムズ)로 개칭했다. 팀 컬러도 야쿠르트 혼샤의 기업 색상이던 빨강·흰·녹색이 되었다.(구단기나 유니폼 등에 사용) 이 해는 시즌 초반부터 크게 뒤쳐져, 8월에는 1936년의 다이토쿄군과 타이를 이루는 16연패를 기록했다.[주 4] 이 연패 기간 중 8월 20일에 통산 200선발승 이상 투수 출신 1호 감독(264선발승)이었던(1968년 취임) 벳쇼 다케히코가 감독을 해임하고, 2군 감독의 오가와 요시하루가 시즌 종료까지 감독 대행을 맡았다. 결국 무려 시즌 92패를 기록하며, 33승 밖에 할 수 없었고,[주 5] 승률은 30%를 크게 밑돌게 되었다.[주 6] 요미우리전, 한신전 모두 5승 21패로 고라쿠엔 구장에서는 13전 전패. 2자리 승리의 투수 제로는 구단 사상 최초였다.{{웹 인용|url=http://www.yakult-swallows.co.jp/pages/company/archive/win_10over |title=구단 아카이브 2자리 승리 투수 |publisher=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accessdate=2015-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