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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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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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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마테 보반  크레시미르 주바크  브루노 스토이치  밀리보이 페트코비치  슬로보단 프랄랴크  안테 로소  발렌틴 초리치  프라뇨 투지만  고이코 슈샤크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세페르 할릴로비치  라심 델리치  엔베르 하지하사노비치  아리프 파샬리치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은 1992년 10월 18일부터 1994년 2월 23일까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과 크로아티아의 지원을 받은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 간 있었던 분쟁이다. 더 큰 분쟁인 보스니아 전쟁의 일부였기 때문에 종종 "전쟁 속의 전쟁"이라고 부른다. 보스니아 전쟁 초기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ARBiH)과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HVO)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과 스릅스카 공화국군(VRS)에 맞서 싸워 동맹했다. 하지만 1992년 말부터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트계 보스니아인 사이 갈등이 고조되었다. 1992년 10월에는 보스니아 중부에서 두 세력 간의 첫 무장 충돌이 발생했다. 군사 동맹은 1993년 초까지 이어지다가 거의 붕괴되었고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트계 사이에 대대적인 분쟁이 일어났다.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은 보스니아 중부에서 격화되어 곧 헤르체고비나 지역으로도 확대되었고 대부분 두 지역에서 전투가 집중되었다. 전쟁 시기는 대부분 산발적인 충돌과 수많은 짧은 휴전기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트계 사이 분쟁은 전면전 수준은 아니였고 비하치, 사라예보, 테샨 같은 다른 지역에서는 계속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전쟁 기간 국제사회에서 여러 평화 계획을 추진했으나 전부 실패했다. 1994년 2월 23일에는 장기간의 휴전을 합의했고 1994년 3월 18일 미국의 워싱턴 D.C.에서 양 측간 휴전협정인 워싱턴 협정이 맺어졌는데 이 때까지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 측은 큰 영토 손실을 입었다. 워싱턴 협정의 합의문에 따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이 수립되었고 세르비아군을 향한 합동 작전이 재개되면서 군사적 균형추가 바뀌고 보스니아 전쟁의 종식으로 이어졌다.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는 크로아트계 보스니아인 관료 17명에게 전쟁 범죄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으며, 이 중 6명은 크로아티아의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과 기타 크로아티아의 관료와 함께 크로아트인이 다수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을 합병 또는 통제하고 보슈냐크인을 인종 청소하러는 공동범죄집단에 가담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보슈냐크인 관료 2명도 분쟁 중에 저지른 전쟁 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ICTY는 크로아티아가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를 전반적으로 통제하고 있으며, 크로아티아군이 보스니아에 진입해 분쟁을 국제화시켰다고 판결했다. 1990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첫 자유 선거가 열렸는데 민족주의 계열 정당이 집권했다. 각각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가 이끄는 민주행동당(SDA), 라도반 카라지치가 이끄는 세르브인 민주당(SDS), 스체판 클류이치가 이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인 민주연합(HDZ BiH)이다. 여기서 이제트베고비치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대통령 의장에 선출되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총리에는 크로아트인인 유레 펠리반이 선출되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의회의 의장으로는 세르브인인 몸칠로 크라이슈니크가 선출되었다. 1990년에서 1991년 기간에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브인이 나중에 세르비아 본국과 통일하여 대세르비아를 구현한다는 구상 아래 각 지역을 "세르브인 자치주"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세르브인은 독립을 선언한 영토를 지키는 데 무장이 잘 되어있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을 활용했다. 1990년 9월에서 10월 초 유고 인민군은 세르브계 보스니아인을 무장시키며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1991년 3월까지 유고 인민군은 소화기 51,900정을 세르브인 민병대에게, 23,298정을 세르브인 민주당 민병대에게 배분했다. 1991년 초 6개 공화국 지도자들은 유고슬라비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일련의 회의를 열었다. 세르브인 지도부는 연방제 해법을 선호했지만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측은 주권국가로의 동맹으로 바꾸길 원했다. 이제트베고비치는 2월 22일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나머지 4개 공화국과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는 비대칭적인 연방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트베고비치도 입장을 바꿔 이런 연방의 전제조건으로 보스니아의 주권국가화를 주장했다. ICTY는 크로아티아의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의 보스니아에서의 궁극적인 목표는 크로아티아 바노비나 국경을 기반으로 한 "대크로아티아"의 수립으로 여기에는 크로아트인 인구가 다수인 헤르체고비나 서부, 포사비나와 기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크로아트인 다수 지역이 포함되었다. 국제 사회는 보스니아의 분할에 반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투지만은 한편으로는 보스니아의 통합을 공식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히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보스니아를 크로아트계와 세르브계로 분할하러는 이중정책을 구사했다. 1991년 3월 25일 투지만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과 카라조르제보에서 만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분할에 대해서 논의했다고 알려져 있다. 6월 6일 이제트베고비치와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대통령 키로 글리고로프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나머지 4개 공화국간의 약한 연방제를 제안했으나 밀로셰비치가 이를 거부했다. 7월 13일에는 당시 EC 의장국이었던 네덜란드가 다른 EC 국가에게 유고슬라비아의 공화국 국경에 대한 합의된 변경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안했으나 다른 국가들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1991년 7월에는 세르브인 민주당 당수 라도반 카라지치와 무슬림 보스니아인 조직(MBO)의 부당수 무하메드 필리포비치가 만나 세르브인과 보슈냐크인 사이에 보스니아를 SR 세르비아와 SR 몬테네그로의 국가연합으로 떠나보낸다는 협정을 작성했다. HDZ BiH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민주당(SDP BiH)은 이 협정을 보고 반크로아트적 협정이자 배신이라고 비난했다. 이제트베고비치도 처음에는 이 안을 환영했으나 나중에는 협정에 대해 일축하며 거리를 두었다. 1991년 7월부터 1992년 1월까지 진행된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기간 유고 인민군과 세르브계 준군사는 보스니아 영토를 사용해 크로아티아를 향한 공격을 감행했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1991년 10월 초에서 11월 초부터 세르브인이 전쟁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확대시키라 예상하고 헤르체고비나 지역의 크로아트인을 무장시키기 시작했다. 이는 보슈냐크인 공동체를 무장시키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1991년 말까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대부분 헤르체고비나 지역 출신의 크로아트인 약 2만명이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에 입대했다.. 크로아티아 전쟁 중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은 "이건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라며 중립을 선포했고, 사라예보 정부는 세르브계 보스니아인과 유고 인민군의 공격 가능성에 대해 방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제트베고비치는 유고 인민군의 요구에 따라 기존 영토방위군(TO)를 무장 해제하는데 동의했다. 하지만 이는 크로아트계 보스니아인과 보슈냐크인 조직이 거부했으며 이들은 많은 영토방위군 시설과 무기를 장악했다. 1991년 9월 21일 크로아티아인 권리당의 부당수이자 크로아트인-보슈냐크인의 동맹을 지지하는 안테 파라지크는 의문스러운 상황에서 크로아티아 경찰에게 살해당했다. 1991년 11월 12일, 다리오 코르디치와 마테 보반이 주재한 회의에서 HDZ BiH의 지역당 지도자들은 "오래된 꿈인 모두의 크로아트인 국가"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기로 합의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크로아티아 바노비나를 선포하는 것이 "크로아티아 문제의 근본적 해결과 민족적, 역사적 [...] 국경을 가진 크로아티아 주권국의 창조를 향한 초기 단계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같은 날 보스니아 서북부의 지방 자치체에서 보스니아 포사비나 공동체 수립을 선포했다. 11월 18일에는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자치공동체(HZ-HB) 수립을 선포하며 이는 분리독립이 아니라 "지역 자치행정을 위한 법적인 근거"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이전의, 그리고 미래의 아무 모든 종류의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한다는 조건 하에 보스니아 정부를 존중하겠다고 맹세했다. 공동체 대통령으로는 보반이 집권했다. 헤르체그보스니아의 지도부는 처음부터 크로아티아 정부와 크로아티아 육군(HV)과의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크로아티아 최고각료회의에서 투지만은 헤르체그보스니아의 수립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독립한다는 결정이 아니라고 밝혔다. 11월 23일에는 보스니아 정부가 헤르체그보스니아를 불법으로 선언했다. 두 크로아티아 공동체의 수립과 관련해 HDZ BiH 지도부도 분열되었다. 당대표인 스체판 클류이치는 공동체 수립 움직임에 반대했지만 헤르체고비나, 중앙 보스니아, 보스니아 포사비나의 지역당 대표는 이를 지지했다. 1991년 12월 27일 크로아티아의 크로아티아 민주연합 대표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HDZ BiH 양 지도부는 자그레브에서 투지만이 의장을 맡은 채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미래와 양 측의 의견 차이, 크로아티아의 정치 전략 수립에 대해 논의했다. 클류이치는 크로아트인이 통일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에 남아있길 원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트베고비치의 정책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투지만의 비판을 받았다. 보반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해체되거나 유고슬라비아에 잔류를 선택한다면 헤르체그보스니아를 선언해 독립된 크로아티아의 영토로 "크로아티아에 귀속될 것이나 이는 크로아티아의 지도부가 [...] 결정해야지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헤르체그보스니아의 부통령인 코르디치는 헤르체그보스니아에서 크로아트인의 정신이 선언 이후 더욱 강해졌다며 트라브니크 지역의 크로아트인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 헤르체그보스니아 영토가 명확한 크로아티아의 경계 안이라는 것 이외의 다른 선택은 모두 반역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회의에서 투지만은 "주권 관점에서 볼 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전망은 없다"라고 말하며 크로아티아의 정책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주권이 크로아티아에게 더 이상 맞지 않을 때까지만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투지만은 세르브인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데도 보스니아 지도부가 이를 믿지 않고 유고슬라비아 남아 있길 원한다고 생각하면서 이 같은 논리를 펼쳤다. 투지만은 "가능한 한 넓은 영토 안에서 크로아트인을 모을 기회를 붙잡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투지만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가 보스니아를 분할하며 "크로아티아는 헤르체그보스니아 공동체와 크로아티아 포사비나 공동체, 그리고 지정학적 이유를 따져볼 때 비하치에 있는 차진 지역까지 차지해 크로아티아의 국익에 거의 최적의 만족을 가져다 줄 것이다"라고 분할안을 설명했다. 잔존 영토에 대해서는 사라예보 주변에 작은 보슈냐크인 국가를 세워 분할된 보스니아에서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 완충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