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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즈카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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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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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즈카 오사무 데즈카 오사무(일본어: 手塚 治虫, てづか おさむ, 1928년 11월 3일 ~ 1989년 2월 9일)는 일본의 만화가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자이자, 오사카 대학을 졸업한 의사이기도 하다. 본명은 데즈카 오사무(手塚 治)다. 《우주소년 아톰》과 《밀림의 왕자 레오》의 작가로 알려졌다. 그의 다작 성향, 선구적 테크닉, 장르의 혁신적인 정립으로 "일본 만화의 아버지", "일본 만화의 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선조는 헤이안 시대 말기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가신 데즈카 미쓰모리이며, 고조, 증조 할아버지도 대대로 에도 시대의 난학자였다. 오사카 제국대학(大阪帝国大学) 부속 의학전문부(医学専門部) 재학 중이던 1946년 1월 1일에 4컷 만화 『마아짱의 일기장』(マアチャンの日記帳, 『소국민신문』(少国民新聞)에 연재)으로 만화가로 데뷔한다. 1947년 사카이 시치마(酒井七馬)가 원안을 그린 만화 단행본 『신보물섬』(新寶島)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오사카에서 아카혼(赤本) 붐을 일으켰다. 1950년부터 만화잡지에 등장, 『우주소년 아톰』(鉄腕アトム), 『정글대제』(ジャングル大帝), 『리본의 기사』(リボンの騎士) 등 히트작을 잇달아 발표한다. 1963년、자신의 작품을 토대로 일본 최초의 30분짜리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우주소년 아톰』을 제작, 이후의 일본의 TV 애니메이션 제작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70년대에는 『블랙잭』(ブラック・ジャック), 『삼목동자』(三つ目がとおる), 『붓다』(ブッダ) 등의 히트작을 발표하였다. 또한 만년에도 『양지의 나무』(陽だまりの樹), 『아돌프에게 고한다』(アドルフに告ぐ) 등 청년만화에 있어서도 걸작을 남겼다. 데뷔 때부터 사망(1989년)할때까지 일선에서 작품을 발표해 나갔고, 생전부터 일본 만화계에서 「만화의 신」(マンガの神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후지코 후지오(藤子不二雄, 藤子・F・不二雄、藤子不二雄A)、이시노모리 쇼타로(石ノ森章太郎)、아카츠카 후지오(赤塚不二夫)、요코야마 미쓰테루(横山光輝)、미즈노 히데코(水野英子)、야시로 마사코(矢代まさこ)、하기오 모토(萩尾望都) 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데즈카 오사무로부터 영향을 받았거나 접촉이 있었던 만화가로 알려져 있다. 데즈카 오사무(본명 오사무治)는 1928년 11월 3일, 일본 오사카부(大阪府) 도요노 군(豊能郡) 도요나카 정(豊中町, 지금의 도요나카시豊中市)에서 데즈카 유타카(手塚粲, 1900년 - 1986년 5월 14일)와 어머니 후미코(文子)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날이 마침 메이지 천황의 생일인 메이지세쓰(明治節)이었기에 「메이지」(明治)에서 한 글자를 따서 「治」를 이름으로 짓게 되었다. 1933년 그의 나이 다섯 살 때에 그의 집안은 1년 전에 타계한 할아버지의 저택이 있던 효고 현(兵庫県) 가와베 군(川辺郡)의 오하마 촌(小浜村, 지금의 다카라즈카시宝塚市) 가와모(川面)로 이주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다카라즈카에는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가 미노오아리마 전기궤도(箕面有馬電気軌道)의 승객 증가를 노리고 전원 풍경 가운데 개발한 신흥 주택지가 산재해 있었고,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宝塚少女歌劇団, 훗날의 다카라즈카 가극단宝塚歌劇団의 전신)의 본거지였던 다카라즈카 대극장(宝塚大劇場)、다카라즈카 패밀리 랜드(宝塚ファミリーランド)의 전신인 다카라즈카 신온천(宝塚新温泉)이나 다카라즈카 루나파크(宝塚ルナパーク) 등 행락시설이 차례로 세워져 일종의 별천지 비슷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고 다카라즈카의 인공적인 근대도시 풍경은 데즈카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오사무의 아버지는 다카라즈카 호텔(宝塚ホテル) 안에서 세워진 다카라즈카 구락부(宝塚倶楽部)의 회원이었고 때때로 오사무는 아버지를 따라 다카라즈카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어머니는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을 따라 다니기도 했다. 또 데즈카 집안의 옆집에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의 남자배역 톱스타였던 아마쓰 오토메(天津乙女, 본명 도리이 에이코鳥居榮子)와 구모노 가요코(雲野かよ子, 본명 도리이 카코鳥居華子)와 이케노베 쓰루코(池邊鶴子, 본명 도리이 히사요鳥居久代) 세 자매가 살고 있어 다카라즈카 음악학교에 입학하고 싶어 하는 여자아이들이 그 보호자와 함께 드나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던 것 등,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의 여성들과 접할 기회도 많았다. 훗날 데즈카는 자신의 첫사랑 상대도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의 생도였다는 것, 다카라즈카 생도를 보려고 다카라즈카 대극장에 다녔다는 것, 쓰키오카 유메지(月丘夢路)나 아와시마 지카게(淡島千景) 같은 당찬 여성을 좋아했었다는 것, 1942년작 쓰키오카 주연의 영화 『신설』(新雪)을 스무 번이나 보았다는 것 등을 회고하고 있다. 1935년, 이케다사범부속소학교(池田師範附属小学校, 지금의 일본 오사카 교육대학부속 이케다 소학교大阪教育大学附属池田小学校)에 입학하였다. 어머니가 도쿄 출신이었던 탓에 긴키 방언을 잘 하지 못했던 그는 학교에서 맴도는 존재였고 2학년때에는 「안경잽이 꼬마」(ガヂャボイ)라는 별명까지 붙어서 괴롭힘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그가 본 것을 그린 만화 그림이 오사무를 구원해 주게 되는데, 소학교 3학년 때 최초의 만화 「핑핑 세이쨩」(ピンピン生チャン)을 완성했고, 그 뒤 만화 연습을 이어나갔으며 소학교 5학년 때에는 장편만화 「지나의 밤」(支那の夜)을 완성하였다. 그 작품은 급우들 뿐 아니라 학교 교사들 사이에도 화제가 되는 등 이후 교사들로부터도 만화를 그리는 것을 묵인받았다고 한다. 만화를 그리는 것으로 학급 내에서 일약 주목받으며 만화가 계기가 되어 처음에는 그를 괴롭히던 급우가 데즈카의 집에 놀러올 정도가 되는 등 차츰 따돌림에서 벗어나게 된다. 데즈카의 생일에는 그의 집에 스무 명이나 되는 친구들이 찾아오기도 했고 친구들이 집에 올 때는 당시에는 진기한 것이었던 홍차와 과자도 가져왔고 오사무의 생일에는 모둠초밥(五目寿司, 이전 문서에는 모듬초밥이라고 했는데, 여러 식재료로 만든 음식은 모둠이라고 해야 한다. 모듬은 학생들이 무리지어 숙제 등 학교 공부를 하는 모습을 뜻함.)이며 계란찜 요리가 가득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 그린 만화의 일부는 이후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에 소장 보존되어 있다. 이 시기에 오사무의 동급생 이시하라 마코토(石原実, 오사카 요도야바시淀屋橋 이시하라 시계점石原時計店 사장)와 친해졌고, 그의 영향으로 곤충이나 과학, 천문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데즈카 집안의 넓은 정원에는 곤충 창고가 있었고、또 주위의 전원지대에서도 많은 곤충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곤충 채집에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환경이었으며, 곤충에 대한 지식과 그에 대한 생각의 깊이를 더하게 해 주었다. 그는 친구들로부터 빌린 히라야마 슈지로(平山修次郎)의 『원색천종곤충도보』(原色千種昆蟲図譜)를 읽으며 딱정벌레목 딱정벌레류(オサムシ)의 존재를 알았고, 이 시기부터 그의 필명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를 쓰기 시작하였다. 1950년 무렵까지는 「治虫」는 그대로 「오사무시」로 읽었다. 1941년 데즈카 오사무는 오사카 부립 기타노 중학교(大阪府立北野中学校, 지금의 일본 오사카 부립 기타노 고등학교大阪府立北野高等学校)에 입학하였다. 당시 일본 전국은 전쟁 중으로 군국주의적인 분위기가 학교에까지 물들어 있었고 소학교 시절과는 달리 만화를 그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학교의 교련 교관에게 그가 만화를 그리는 것이 눈에 띄어서 교관에게 얻어맞기까지 했다. 이 시기 그는 급우들 사이에서 제작한 동호회 회지(会誌) 등을 통해 만화를 집필하는 한편으로 데즈카판(手塚版) 「원색 딱정벌레 도보」(原色甲蟲圖譜) 등 일러스트가 곁들여진 도감을 자체 제작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1944년 여름에는 체력이 약한 자가 들어 가는 강제수련소에 보내졌다. 9월부터는 학교에 다니는 대신 군수공장에 보내졌는데, 이곳에서 데즈카는 격납고 지붕을 덮는 슬레이트를 제작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1945년 3월, 전쟁에 따른 수업 연한 단축에 따라 기타노 중학을 4년만에 졸업하고 6월에 근로봉사로 감시초를 서고 있을 때 오사카 대공습이 벌어졌는데, 오사무의 머리 바로 위로 소이탄이 투하되는 와중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이 공습은 데즈카 자신의 체험담으로써 훗날 그가 1974년에 그린 만화 『종이상자』(紙の砦)나 1979년부터 1년 간 그린 『세게 때리기』(どついたれ) 등 자전적 작품 속에서 묘사된다. 이 체험 이후 데즈카는 공장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집안에 틀어박혀 만화 그리기에 몰두한다. 1945년 3월에 구제 나니와 고등학교(舊制浪速高等学校)에 응시하였으나 불합격하였다. 패전 한 달 전인 7월에 데즈카 오사무는 오사카 제국대학(大阪帝国大学)의 의학전문부(医学専門部)에 응시해 입학을 허가받았다. 의학전문부는 전쟁의 장기화로 군의관을 속성으로 길러내기 위해 임시로 오사카 제국대학 내에 부설된 것으로 학제상으로는 구제 의학전문학교로 취급되었다. 때문에 구제중학교에서 입학하는 것도 가능했다. 오사카 대학(大阪大学, 옛 오사카 제국대학) 부속 의학전문부는 1951년에 폐지되었다. 한편 의사국가시험에 합격했을 때 그는 한창 《정글대제》와 《우주소년 아톰》을 연재하던 와중이었다. 종전 후, 학생인 데즈카 오사무는 전시에 그린 장편 중에서 "유령남(幽霊男)"("메트로폴리스"의 원형)이라는 장편을 마이니치 신문 학예부에 보냈다. 이는 소식 없이 끝났지만, 그 후, 이웃집에 살던 마이니치 신문의 인쇄국에 다니는 여성의 소개로 어린이의 소국민신문(현 매일소학생신문) 학예부의 호도노(程野)라는 사람을 만나, 그의 의뢰를 받아 소국민신문의 오사카 판에 4컷 만화 "마아짱의 일기장(マァチャンの日記帳)"을 연재(1946년 1월 1일~3월 31일), 이 작품이 데즈카의 데뷔작이 됐다. 이 "마아짱"은 로컬이면서 인기가 있고 인형과 바리 막과자의 캐릭터에 사용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마아짱에 이어서 4월부터 교툐일일신문에 4컷 만화 "진념과 쿄짱(珍念と京ちゃん)"을 연재했으며 이들과 함께 4컷 형식의 연재 장편 작품 "A짱 B짱 탐험기(AチャンB子チャン探検記)", "화성에서 온 남자(火星から来た男)", "로스트 월드(ロストワールド)" (후술 하는 것과는 별개) 등도 각지에 그려지고 있지만 4컷 연재 형식에 한계가 있어, 후 2자 어느쪽도 중단에 가까운 형태로 끝났다. 만화가로서 데뷔 전의 1945년경, 2대째 카츠라하루단지가 지방에서 자주 흥행을 할 때의 포스터화를 제공했다(현물은 다카라즈카 시립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2대 하루단지가 다카라즈카시 청황신 거주라는 것도 있어, 친분을 먹으면서, 데즈카의 만화가를 지망하는 진로를 걱정하고, 만담가가 되라고 권했다고 한다. 1946년 동인지 "망가만"의 정례회를 통해서 후원자인 사카이 시치마(酒井七馬)와 알게 되어 사카이에서 장편 스토리 만화의 합작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는 전후 최초의 호화본의 기획이며, 그것까지 장편 만화를 그리다 모으고 있던 테즈카로서는 바라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이렇게 대략적인 구성을 사카이가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테즈카가 자유롭게 그리려고 하는 형태로 200쪽의 그림 장편 "신보물섬"이 제작된다. 1947년 1월에 출판되자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베스트셀러었다. 영화적 구성과 빠른 이야기 전개를 가진 "신보물섬"은 일반적으로 전후 스토리 만화의 원점으로서 포착된다 베스트 셀러가 된 "신보물섬"은 오사카에 적본붐을 일으키면서 데즈카는 이에 타서 그린 단행본 형태로 장편 작품을 발표하게 된 . 데즈카는 바빠지고, 그동안에 그리고 쌓아 온 장편을 바탕으로 학업과 아울러 한달에 1,2권은 작품을 그리 올려야 했다. 1947년에 발표된 "화성박사"(火星博士), "유령 코롱코 박사(怪人コロンコ博士)", "킹콩(キングコング)" 등은 어린이를 의식한 B급 영화적인 작품이었지만 1948년 "지저국의 괴인(地底国の怪人)"에서는 비극적인 전개도 도입하게 되고 SF 모험 등을 소재로 작품 중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그 해 말에 그려진 "로스트 월드"에서는 다양한 입장의 인물이 얽혀 지구 규모의 장대한 이야기가 그려지져, "메트로폴리스"(1949년) "와야할 세계(1951년)와 함께 데즈카의 초기를 대표하는 SF 3부작을 이룬다. 1949년 서부 영화 "권총 천사"에서는 아동 만화에서 최초의 키스 장면을 그렸다. 1950년에는 문호 괴테의 "파우스트를 만화화한 것 외에 '영화 제작의 무대 뒤를 보여드리겠습니다'라는 도입으로 시작되는 '신비 여행기', 자신의 만화 수법을 체계화하여 보여준 만화 입문 책의 선구적 작품 '만화대학' 등을 발표하고 있다. 만화 집필이 바쁘게 되면 대학의 단위을 얻기가 힘들어지는데, 데즈카는 의업과 만화와 겸직은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됐다. 교수에서 의사가 되기보다는, 만화가가 되라고 충고하고 또 어머니의 뒷받침도 있고, 데즈카는 전업 만화가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학교를 그만둔 것이 아니라, 1951년 3월에 의학 전문부를 졸업(5년제, 1년 유급. 이 해에 전문부가 폐지되면서 마지막 졸업생이 되었다)하고 오사카 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에서 1년간 인턴을 맡아 1952년 3월에 제십이회 의사 국가 시험에 합격, 1953년 9월 18일에 의적이 등록된다. 이 때문에 나중에 데즈카는 자서전 "나는 만화가"에서 "거기에서 지금도 본업은 의사이시고 부업은 만화인데, 누구도 묘한 얼굴을 하고 이 사실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데즈카는 오사카에서 아카모토 만화를 그리는 옆, 도쿄에 반입도 하고 있다. 당초에는 코단샤에서는 거절당했지만, 신생각이라는 출판사에서 반입이 성공해, 여기에서 몇 개를 읽은 뒤, 신창간된 잡지 '소년 소녀 만화와 독서'에 1950년 4월부터 '타이거 박사의 진여행'을 연재, 이것이 데즈카의 최초의 잡지 연재 작품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부터 잡지 '만화 소년'(학동사)에서 '정글 대제'의 연재를 개시, 1951년에는 '철완 아톰'(1952년-)의 전신이 되는 '아톰 대사'를 '소년'(코분샤)에 연재하는 등 다수의 잡지에서 연재를 시작했고, 이 해에는 소년 만화지의 대부분에서 데즈카의 만화의 연재가 개시되었다. 1953년에는 "소녀 클럽"(코단샤)에서 『리본의 기사』의 연재를 개시했다. 다카라즈카 가극이나 디즈니로부터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이후의 소녀 잡지에 있어서의 이야기 만화의 선구가 되었다. 1954년에는 '정글 대제' 연재 완결 후에 '만화 소년'에 '불새'의 연재를 시작했다. '불새' 시리즈는 그 후도 휴간 등에 의해 COM, 만화 소년, 야성 시대와 게재지를 바꾸면서 오랜 세월로 그려져, 데즈카의 라이프 워크가 되었다. 월간의 잡지 연재라는 형태는, 데즈카가 그간 단행본으로 다녀온 복잡한 이야기 구성의 재검토를 강요시키고, 독자를 끌어당기기 위한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기나 단순한 이야기 구성 등의 작극 방법에 데즈카를 향하게 되었다 . 한편, 신작 단행본은 1952년의 '밤비' '죄와 벌'의 2권으로 끝을 말하지만, 대신 우편법 개정에 의해 이 시기에 잡지 부록이 급격히 증가해 데즈카는 연재 작품과 평행하여 부록 책자의 형태로 신작 장편 작품을 다수 다루고, 이 형태로 단행본 시대의 작품도 잇달아 리메이크 되었다. 사생활의 면에서는, 1952년에 다카라즈카에서 도쿄로 이주해, 또 다음 1953년에 「만화 소년」편집부로부터의 소개로 도시마구의 도키와 장에 입주 했다. 그 후 도키와 장에는 데즈카에 이어 테라다 히로오 , 후지코 후지오가 입주. 데즈카는 자신이 살고 있던 14호실을 후지코 후지오의 두 사람에게 양도해 도키와 장에서 에서 이동했지만, 그 후에도 이시노모리 쇼타로, 아카츠카 후지오 등 후에 유명한 만화가가 되는 사람들이 잇달아 입주해 도키와 장은 만화가의 양산장이 되었다. 이 시기, 데즈카는 도키와 장의 만화가에게 영화를 많이 보도록 추천하고 있어, 데즈카 자신도 십수년간은 해에 365개를 반드시 보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1953년 데즈카는 간사이의 부호 순위의 화가의 부에서 톱이 되었지만, 직장이 목조2층 건물의 도키와 장이어서 취재하러 온 신문 기자한테 질렸기 때문에, 이후는 의식하고 고가품을 사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철완 아톰", "나의 손오공" 등 아동 만화의 인기 작품의 연재를 하면서 데즈카는 1955년에 성인향 만화 잡지 "만화 독